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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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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 === 아우구스투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로마 황제라는 제도 자체는 확립'''해놓았으나 로마 황제의 계승에 대해서는 불안정성 및 혼란이 지속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군주제]]에서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서 군주의 친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친아들이 2명 이상이라면 그 중에서 적장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도록 했고 아우구스투스도 당연하게도 자신의 가문과 핏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도입하게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일부일처제]]로 공식적인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생아]]에게도 재산의 일부를 준다던지 하는 배려는 있으나 공식적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의 직위나 직책을 상속받지는 못한다. 이런 점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나 [[얼자]]와는 다른 것으로 서자나 얼자는 적자보다 등급이 내려가지만 혼인관계에 의한 자식으로 인정받으며 적자가 없다거나 하면 가문을 계승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 다산을 장려해도 자식이 없거나 딸만 낳거나 해서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고대 로마에서는 양자제도를 활용하고 딸에게도 상속권을 부여해주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귀족가문을 보면 종종 딸과 결혼한 사위가 장인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어 가문을 계승하거나 딸이 낳은 자식 중 한명을 외가에 양자로 보내서 가문을 계승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점에 착안해서 자신의 딸로 핏줄을 이어주는 방식으로 황제의 세습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태종]]의 역할을 담당해서 로마 제국을 안정화시키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확립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 황제'''로 만든 것이 큰 실책이었다. 티베리우스도 형식상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혈연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 입장에서는 가급적 빠르게 로마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들과 한 판 붙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딸이 낳은 자식에게도 계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주국에서 국왕의 측근이 되는 [[외척]]이 사라지고 모두가 황위 계승 경쟁자가 되는 막장사태가 발생한다. 원래 외척이 국왕의 측근이 되는 이유는 외척은 스스로는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제한을 모조리 풀어놓았으니 모조리 제위를 향해 달려나가는 계승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부터 [[네로]]에 이르는 계승과정이 매우 혼란스럽게 전개되었으며 집권한 황제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친척들을 제거했다. 물론 친척들도 서로간에 제위 계승을 두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황제의 자식을 독살하거나 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애초에 황제건 친척이건 간에 제위계승서열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것도 황제나 친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이어질수록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사람은 극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네로의 통치시기 중반에 도달하면 도저히 황위 계승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멀어진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황가가 사실상 씨가 말랐으며 수틀리면 돌아설 가능성이 높은 동맹 귀족 가문들만 남게 된다. 결국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을 가져온 것은 아우구스투스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황위 계승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핏줄로 이어지는 혈연관계가 중요하지만 본인에게 친아들이 없다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티베리우스로 시작되는 적장자 계승 체제를 만들며 아우구스투스의 딸이 낳은 자식들은 티베리우스의 자식과 혼인을 이어나가는 별도의 황비 가문을 만드는 것이 적절했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신이 이미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를 준 만큼 직계 후손이 로마 황제가 되는 것은 안되는 것으로 등가교환을 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니 '''신의 분노를 사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말이 당대에도 있을 정도로 아우구스투스의 변칙적인 황위계승방식은 당대에도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검다리 황제가 되는 바람에 원래는 우군이어야 할 황족들의 공격을 받는 등 고생이 심했으나 어찌되었든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확고하게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제정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면서 황제 계승 후보자가 최전선에 나가야만 하는 관행도 [[클라우디우스]] 이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처럼 휘하 장군들이 수행한 전쟁도 황제의 공으로 인정되어 자연스럽게 개선식을 치르게 되며 정리된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앉아서 서류만 만지지 않고 직접 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잠깐이나마 브리타니아를 방문해야 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만이 불릴 수 있는 칭호에서, 자연스럽게 황제 가문이 세습하는 칭호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황족들이 서로 무한경쟁을 하며 서로 죽여대는 상황인지라 제위 계승이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졌고 황족들의 숫자가 줄어들며 제위 계승이 불투명하게 변했다. 따라서 칭호와 권한의 세습을 통해 자신의 혈통이 제위를 이어나가기를 바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네로]]가 68년 원로원과 군대에게 불신임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이후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69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아래에서 안정을 찾는다. 네 황제의 해 이후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네로가 사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멸문당했다. 이때, 혼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를 승계하며 자신의 제호에 카이사르를 덧붙였으며 입법을 통해 자신의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즉, 이전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들이 휘두르던 황제권과 권위를 자신 집안이 온전히 물려받았다는 제스쳐였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프린켑스]],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지위가 한 사람에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마치 관습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였던 것마냥 재해석했다. 아울러 새로 개편한 원로원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습가문으로 공인받고, 임페라토르를 사용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적법한 마지막 통치자를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로 정의내린다. 그리고 이때 클라우디우스 신전 등을 복구시키면서 임페라토르 직위의 정통후계자가 본인과 그의 두 아들들임을 천명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했던 것은 현직 임페라토르가 아닌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칭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현직 임페라토르가 개인 성씨와 상관없이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최초였다. 하지만 원로원조차 41년 당시 대놓고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 네로인건 다 아는 사실이다", "클라우디우스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며, 본래부터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다. 즉, 카이사르를 제호를 취했다고 해도 플라비우스 가문과 달리 쌩뚱맞은 타인이 택한 이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를 택한 이유는 완벽한 정통성을 위해 취한 이름이었던 셈이다. 반대로 플라비우스 가문이 카이사르를 참칭(?)한 것은 이들 가문을 승계하여 자신의 가문에게 그 권위를 덧씌우기 위해서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정치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이후부터 임페라토르 직위와 칭호사용도 변하게 된다. 먼저 제위에 오른(더 정확히 말하면 원로원 승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하면서, 프라이노멘에 임페라토르를 붙였다. 이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임페라토르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라서 오토가 생뚱맞게 만든 전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그들의 친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굳이 자신들의 프라이노멘으로 임페라토르를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옛 공화정 전통대로 자신들이 임페라토르로 찬사받은 횟수를 IMP I(임페라토르로 1번 찬사받음), IMP II 등으로 표기했다.] 이때 이후로 황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또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중해 동쪽 세계에서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Autokrator)로 차용해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인이기도 한 [[플루타르코스]] 등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라틴어 어감을 살려 사용한 탓에 독재자 이미지보다는 제국의 황제라는 뜻이 더 강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와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등이 사용한 아우토크라토르와는 어휘상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묘하게 있었다고 한다. 반면 제정 시대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동로마 제국|동쪽 절반]]에서는 황제를 그리스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불렀다.[* [[로마법 대전]]에 수록된 그리스어 사료 중에 그리스인이 로마 황제에게 청원하자 황제가 비답을 내린 것이 있는데, 거기서도 청원인이 황제를 '바실레우스'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와 라틴어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동의어가 되었다. 다만 11세기에 들어서부터는 [[아프토크라토르]](전제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ocracy의 어원) 칭호를 부활시켜 바실레프스 케 아프토크라토르라고 불렀다.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임페라토르 직위는 보다 제도화됐다. 이때가 되면 부자세습이 당연시되고, 제왕교육으로 부를 수 있는 후계자 양성이 관례, 제도로 굳어진다. 따라서 예전 아우구스투스 시절처럼 후계자가 굳이 최전선에 나가서 군공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이탈리아 안에서 머물게 하면서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어떤 잡음이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를 비롯한 여러 새로운 형태로 여러 명예, 지위를 내렸다. 이를 통해 아예 원로원의 추인 없이도 임페라토르 직위가 부자 세습이 되도록 기반을 닦았다. 나중에 [[다섯 황제의 해]]를 종결하고 내전의 승리자로서 제위를 취한 [[세베루스 왕조]]는 무력으로 원로원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부자세습에 어떠한 잡음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후로 임페라토르 직위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동쪽 일대의 인식과 같이 전제군주에 가까운 것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를 마련하고 부자세습이 당연시되며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세베루스 왕조까지 부자세습으로는 2대를 넘기지 못하는 등 단명했으며 오히려 [[오현제]]로 불리는 네르바 -안토니우스 왕조가 오래 버텼고 양자 세습이 끝나고 친아들에게 물려주자마자 [[콤모두스]]가 말아먹으면서 왕조가 끝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로마인들에게 인정받았고 부자세습도 가능은 하지만 아예 왕조를 이루면서 장기간 세습하는 것은 확립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유능하고 통치 기간도 매우 길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각각의 왕조 창립자는 유능했으나 고령이나 질병등으로 인해 통치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으며 후계자가 젋은 나이에 즉위하여 황권을 확립하지 못했거나 무리한 황권강화책을 쓰거나 집안싸움이 벌어지거나 폭정을 하거나 무능하거나 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황제가 추대된 후 내전이 발생하고 현임 황제가 암살되거나 폐위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이 로마 제국의 외부와 내부의 위기와 함께 심화된 것이 [[군인 황제 시대]]다. 이러한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완전한 전제군주제를 도입하면서 해결이 이루어졌으나 함께 도입한 [[사두정치]]는 본질적인 승계 모순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공치제]]를 도입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대신 기독교의 힘을 얻어서 황제에게 왕권신수설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힌다. 그러다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분할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최후의 순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혼란 끝에 국가가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 구조를 유지한 채 중세의 로마 황제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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